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어디 머피 (문단 편집) == 군 시절 == 평소부터 군인이 되기를 소망했던 그는 1941년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하자 애국심에 참전을 결심, 미 육군과 미 해군, 미 해병대에 지원했으나, 입대 제한연령에 미달했고, 166cm의 키에 50kg 몸무게도 신체검사 기준에 미달하였기 때문에 모두 낙방했다. 그는 곧 몸무게 증량을 위해 식단을 조절하고, 누나의 도움을 받아 [[출생증명서]]를 위조한 끝에 결국 미 육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1942년 6월 30일 미 육군에 입대한 그는 보병주특기로 현 텍사스 주 소재인 캠프 월터스[* 현 포트 월터스. 현재는 텍사스 주방위군 훈련소로 사용중.]에서 신병훈련을 받았다. 당시 신병중대장은 왜소한 그의 체격을 보고 전투보병으로 체력이 모자라지 않을까 우려하여 조리주특기로 변경을 제안하였지만 그는 전투보병을 희망하여 13주간의 신병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Marksman Badge와 Expert Badge를 받았다. 후반기 고등보병 훈련은 [[메릴랜드]]주 포트 미드[* 현 미 사이버 사령부 본부이면서 정보병과특기 훈련생이 여기서 교육받는다.]에 주둔한 제76보병사단에서 받았다. 1943년 1월 고등 보병훈련을 마치고, 미 [[뉴저지]] 주에 위치한 캠프 킬머 보충대를 거쳐 1943년 2월 20일, 프랑스령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위치한 미 육군 제3보병사단(사단장 Lucian K. Truscott, Jr. 소장) 15보병연대 1대대 B(베이커) 중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자대 배치 이후 그는 3사단과 함께 알제리의 아르쥬에서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작전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고, 5월 7일 일등병으로 진급했다. 7월 10일 시칠리아 상륙작전 당시 리카타 지역에서 척후 정찰 중 도망 중이던 이탈리아군 장교 2명을 사살하고, 7월 15일 상병(Corporal)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열흘 후 소속중대가 팔레르모를 도착했을 때는 환자 열외로 전투에 불참했고, 회복 후에는 연합군이 작전목표인 메시나 항을 향하는 도중에 산 프라텔로에서 본대가 교전을 하는 동안 고지에 있는 기관총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투에 참여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 전선|유럽 본토 침공]]의 일환으로 실시된 살레르노 상륙 작전 당시에는 배티파글리아로 파견돼 볼트루르노에서 척후 중 독일군의 기습을 받았으나 전사자 1명의 피해만 입은 것 이외에는 별다른 피해없이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적군 5명을 사살, 그리고 10월달에 있었던 전투에서는 7명의 독일군의 공세를 방어해내면서 3명 사살, 포획 4명의 업적을 이뤘고 그해 12월 13일 병장으로 진급한다. 1944년 1월 13일 하사로 진급 후 [[안치오 상륙 작전]]에 참가했다. 3월 2일 교전 중 포격을 받고 파괴된 독일군 전차에서 탈출하는 전차병을 사살하였으나, 전차가 수리 후 재사용 가능한 상태임을 확인하고 홀로 적진으로 침투하여 재사용이 불가능하도록 [[총류탄]]으로 전차를 파괴했다. 이 무공으로 그는 [[동성 훈장]]을 받았다. 계속된 전투의 결과 5월 8일에는 [[전투보병휘장]]과 두 번째 [[동성 훈장]]을 받았다. 8월 4일에는 부소대장직을 맡았다. 1944년 8월 15일. 남프랑스 전역에서 라마투엘르의 포도밭으로 이동 중 독일군의 기습을 받자, 기관총으로 응전해 2명 사살, 1명 부상을 기록한다. 곧이어 저택에서 2명의 독일군이 투항의사를 밝히고 나와 그의 절친이 처리차 다가가자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갑자기 발포]], 절친을 살해하자, 곧바로 진격해 응사, 6명을 사살, 포획 11명을 기록한다. 이 무공으로 그는 미국의 2등급 무공훈장인 [[수훈십자훈장]]을 수훈했다. 1944년 9월 15일 북동부 프랑스 전역에서 작전 중, 박격포 공격으로 부상을 입어 [[퍼플 하트]]를 받는다. 이 시점까지 15연대 B중대에 남아있던 파병1진 대원은 머피를 포함해 단지 3명에 불과했다. 연일 계속되는 전투 중인 10월 2일 완벽하게 방어된 독일군 기관총 진지를 단독으로 공격하여 적 전방 14m 앞에서 수류탄 공격으로 기관총 진지를 섬멸하는 전공으로 미국의 2등급 무공훈장인 [[은성 훈장]]을 수훈했다. 10월 5일에는 독일군이 점령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단독으로 SCR-536 무전기를 메고, 독일군의 직접 사격을 받으며 적 전방 180m 지점까지 이동 후 정확한 좌표로 포병화력 지원을 요청, 엄폐된 진지에서 방어 중이던 독일군 다수를 섬멸했다. 중대가 고지를 점령했을 때 남겨진 독일군 전사자는 15명, 부상자는 35명이었다. 이 무공으로 그는 두 번째 [[은성 훈장]]을 수훈했다. 10월 14일에는 [[현지임관]]을 통해 소위로 진급하고, 15연대 B중대 3소대장직을 맡았다. 10월 26일 3소대가 독일군 [[저격수]]의 공격을 받자 단독으로 우회 기동하여 독일군 저격수 3명을 생포하려 하였으나, 급습을 알아차린 저격수의 선제사격으로 부상을 입어 대응사격으로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다. 이때 심각한 부상으로 후송을 가게 되었으나 당시 기상상황으로 인해 후송이 3일간 지연되고, 응급실 사정으로 입원이 몇 일간 추가 지연되어 총상 부위가 괴사되는 바람에 1944년 12월 28일까지 병원에 입원했다. 이 부상으로 그는 [[퍼플 하트]]를 추가로 수훈했다. [[파일:scan_pic0218_rdax_500x272.jpg]] 1945년 1월 14일 15연대 B중대 3소대장 보직으로 복귀했다. 이후 진행된 16일간의 라인강 콜 마르 포켓 교두보 전투에서 머피는 두 다리에 다시 부상을 입어 [[퍼플 하트]]를 또 다시 추가로 수훈했다. 이 전투 개시 직전 235명이었던 B중대는 1월 26일 시점에 중대원 총원 18명으로 감소해 있었다. 다리 부상에도 후송을 거부하고 중대에 남았던 머피는 중대에 남은 유일한 장교였기 때문에 중대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날 6대의 독일군 전차와 다수의 보병들이 B중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머피는 중대원들에게 숲 속으로 이동하여 엄폐사격을 명령하고, 자신은 독일군의 직접사격을 받으며 중대지휘소에 홀로 남아 무전으로 중대를 지휘하며 자신의 M1 카빈으로 사격을 하고, 곧 파괴된 아군의 [[M10 GMC]] 대전차 자주포에 탑승하여 자신의 몸을 노출시킨채 자주포에 장착된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으로 몰려드는 적 보병을 사살하기 시작했다. 자살행위에 가까운 이 절망적인 전투는 한 시간 가량 지속되었는데, 사살한 적군은 350명 정도로 추정되며 놀랍게도 머피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을 뿐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이 부상에도 머피는 다시 후송을 거부하고 중대에 남기를 고집했다. 이 자살행위에 가까운 놀라운 무공으로 그는 미국의 1급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훈했다. 이후 거듭되는 전투 끝에 1945년 2월 16일 그는 중위로 진급했다. 3월 11일 연대장은 부상으로 몸이 엉망인 그를 전장에 빼내 연대본부 연락장교로 보직을 변경하였으나 5월 20일 B중대의 주요 장교들이 전투 중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위기에 빠진 중대를 돕기 위해 연대본부 인원을 무단으로 차출하여 B중대로 달려가 위기에 빠진 중대를 구출했다. 1945년 8월 21일 전쟁 중 부상으로 인해 50% 장애등급을 받고 중위 계급으로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전역했다. 이후 생업과 병행하는 [[주방위군]]과 연방예비군에서 [[소령]]까지 진급하고 1969년 5월 22일 퇴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